대한상의 2,186개社 조사, 경쟁우위 지속 기업 16.1% 불과
신사업 추진률도 42.4%에 그쳐
한국 제조업이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기존 주력제품의 시장 포화와 경쟁력 상실이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이를 대체할 신사업 개발마저 부진한 ‘사면초가’ 상황이 현실로 드러났다.
대한상공회의소(www.korcham.net)가 발표한 ‘신사업 추진현황 및 애로사항’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제조업체 2,186개社 중 82.3%가 현재 주력제품의 시장이 성숙기(54.5%) 또는 쇠퇴기(27.8%)에 접어들었다고 응답했다. 수요 증가세를 보이는 성장기 기업은 16.1%에 불과했으며, 시장 형성 초기인 도입기 기업은 1.6%에 그쳤다.
업종별 분석 결과, 공급과잉이 심각한 전통 제조업의 위기가 더욱 두드러졌다. 비금속광물 업종이 성숙·쇠퇴기 비중이 가장 높았으며, 정유, 석유화학, 철강이 뒤를 이었다. 한국의 대표 수출 산업인 기계, 섬유, 자동차, 식품, 전자 등도 모두 80%를 넘는 기업이 레드오션에 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글로벌 공급과잉 심화와 맞물려 있다. OECD 자료에 따르면, 철강산업의 경우 `24년 글로벌 과잉생산능력이 6.3억톤에 달했으며, `27년에는 7억톤을 초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한국의 연간 조강생산량(6,300만톤)의 10배가 넘는 규모다.

석유화학 업종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향후 2~3년간 1,500만톤 규모의 에틸렌 및 범용 폴리머 신규 공장이 가동될 예정이어서 `30년까지 공장가동률 하락이 지속될 것으로 분석했다.
시장 포화가 진행되면서 경쟁 격화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현재 주력제품 시장에서 ‘경쟁우위를 지속하고 있다’고 답한 기업은 16.1%에 불과했다. 나머지 83.9%의 기업은 경쟁우위를 상실했거나 추월당한 상황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기술격차가 사라져 경쟁이 치열하다’는 응답이 61.3%로 가장 많았고, ‘경쟁업체가 턱밑까지 추격한 상황’이 17.1%, ‘경쟁력에서 이미 추월당했다’는 응답도 5.5%에 달했다. 서울대 경영학과 박혁준 교수는 “한국 제조업이 추격형 성장모델의 한계에 직면한 것”이라며 “기존의 원가경쟁력과 품질개선 전략만으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한 성장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신사업 추진이 부진하다는 점이다. 현재 주력 제품을 대체할 신사업을 추진하고 있거나 검토 중인 기업은 42.4%에 그쳤으며, 과반수인 57.6%는 ‘현재 진행 중인 신사업이 없다’고 응답했다.
신사업을 추진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자금난 등 경영상황 악화’(25.8%)가 가장 큰 요인으로 꼽혔고, ‘신사업 시장성·사업성 확신 부족’(25.4%), ‘신사업 아이템 미발굴’(23.7%)이 뒤를 이었다. ‘인력 등 제반여건 부족’(14.9%)과 ‘보수적인 경영 방침’(7.3%)도 주요 장애요인으로 지적됐다.
신사업을 추진하는 기업들의 방식을 보면 ‘자체 연구개발(R&D)’이 62.9%로 가장 많았고, ‘외부와의 협력’이 27.7%, ‘인수합병(M&A)’은 4.1%에 불과했다. 독자개발 선호 경향이 뚜렷하지만, 자금과 인력 제약으로 인해 실제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신사업 추진 과정의 애로사항도 기업 규모별로 차이를 보였다. 전체적으로는 ‘신사업 시장전망 불확실성’(47.5%)이 가장 큰 어려움으로 지적됐다. 이는 對美 관세협상 불확실성과 내수경기 침체 장기화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중소기업들은 ‘추진자금 부족 및 조달’(38.5%)과 ‘판로확보 및 유통경로 개척’(35.9%)을 주요 애로사항으로 꼽았다. ‘기술과 제품 완성도 부족’(30.1%), ‘담당인력 및 전문인재 부족’(20.9%), ‘규제·인허가 등 제도상의 문제’(10.0%)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제기됐다. 배터리 소재 업체 관계자는 “신소재 개발과 생산량 확대를 위해 400억원 규모의 설비투자가 필요하지만 자금조달이 어려워 답보 상태”라며 “은행 대출로는 한계가 있어 벤처투자를 받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대한상의는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정부의 전방위적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최근 기업부담을 가중시키는 법안들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투자 촉진 정책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정책 제안으로는 ▲투자 직접환급제 도입 등 첨단산업 투자 인센티브 확대 ▲제조 AI 특구 지정과 AI 펀드 조성을 통한 제조업 디지털 전환 지원 ▲위기산업 대상 과잉설비 폐기 세액공제 특례 재도입 ▲신사업 투자 세제지원 확대 등을 제시했다.
산업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한국 제조업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중국의 추격과 선진국의 기술 장벽 사이에 끼인 ‘넛크래커’ 상황”이라며 “정부와 기업이 협력해 혁신생태계 구축과 신성장동력 발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