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능·가격·AS ‘3박자’ 갖춘 중국산 설비의 대공습
韓 시장 ‘글로벌 하이엔드 진출’의 교두보로 삼아 총력전
중국산 SMT 설비의 공세가 예사롭지 않다. 아니, 공세를 넘어 ‘시장 잠식’의 단계로 진입했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과거 ‘싼 게 비지떡’이라는 인식 속에 단기 사용 후 폐기되던 저가 장비들이, 이제는 강력한 가격 경쟁력을 유지한 채 ‘성능’이라는 무기까지 장착하고 한국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의 장기화와 중국 내수 침체라는 이중고(二重苦) 속에, 한국 시장은 중국 업체들에게 글로벌 하이엔드 시장 진출을 위한 ‘최종 관문’이자 반드시 점령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국내 SMT 제조 현장에서 중국산 설비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형 임가공 업체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고육지책’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산 설비는 가격적인 이점 외에는 내세울 것이 전무했다. 성능은 단순했고, 내구성은 현저히 떨어졌다. 생산품질이 균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매 업체들조차 성능이나 체계적인 애프터서비스(AS) 지원을 기대하지 않았다. 길면 2년, 짧으면 1년 정도 사용하고 고장이 나면 수리보다 폐기를 선택하는 ‘일회용 소모품’과 같은 존재였다.
특히 시장 진입 초기에는 중국산 성능에 대한 현장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한국의 SMT 현장은 전 세계적으로도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빠른 작업 전환 속도와 정밀도, 그리고 한국 엔지니어들이 선호하는 특유의 유저 인터페이스(UI)와 편의 기능들이 존재하는데, 초기 중국산 장비는 이러한 한국적 특수성을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의 기류는 완전히 다르다. 업계 관계자들은 “불과 4~5년 전의 중국 설비와 현재의 설비는 천지 차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업체 관계자는 “중국 업체들의 기술 진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막대한 내수 시장을 등에 업고 대량 생산 및 공급 경험을 통해 단기간에 방대한 현장 데이터와 기술 노하우를 습득했다”며, “과거의 투박했던 장비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중국산 설비라고 무시했다간 큰코다칠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현재 국내 시장에 진입한 중국산 설비는 칩마운터를 제외한 스크린프린터, 리플로우 오븐, 광학검사기(AOI) 등 SMT 생산 라인의 전 영역에 포진되어 있다. 해당 업계에서는 이들 설비의 성능이 국내 설비와 엇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다고 평가한다. 물론 초정밀 반도체 패키징 등 최상위 하이엔드 공정 적용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으나, 일반적인 수준의 가전, 모바일, 전장 부품 등 대다수 전자산업계 물종을 소화하는 데는 전혀 이상이 없는 수준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격의 역설’이다.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음에도 가격은 여전히 기존 국산 설비의 그것보다 월등히 앞서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성능 개선 비용을 가격에 전가하지 않고, 압도적인 생산 물량을 통해 원가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 투자 비용에 민감한 국내 업체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인책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업체들은 왜 하필 지금, 이토록 공격적으로 한국 시장을 두드리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중국 내부의 절박한 경제 상황과 급변하는 국제 정세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첫째, 중국 내수 시장의 심각한 결빙(結氷)이다. 현재 중국 내부는 제조업 투자가 위축되고 SMT 경기가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공급 과잉과 내수 부진이 맞물리며 자국 내 제조업체들의 신규 설비 투자가 급감했다. 물론 중국 정부는 설비 및 소비재 교체 지원 사업인 ‘양신(兩新)’ 정책을 통해 경기 부양을 시도하고 있다. KOTRA가 지난 9월에 발표한 ‘2025년 하반기 중국 경제 전망’에 따르면, `25년 상반기 중국 설비 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17.3% 증가했고, 특히 ‘이구환신(以舊換新·신제품으로 노후 제품 교체 시 보조금 지급)’ 지원 대상인 자동차 관련 산업 투자는 17.9%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를 ‘일시적 착시 효과’로 분석한다. KOTRA에서는 중국 제조업의 생산능력 이용률(가동률)을 살펴본 결과, 투자의 고신장세가 하반기까지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전망을 내놨다. 공장을 돌릴 일감이 없는데 설비만 늘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 설비 제조사들은 생존을 위해 쌓여가는 재고를 처리할 해외 판로가 절실해졌다.
둘째,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한 ‘수출 지형도’의 변화다. 무역전쟁 이전, 중국 업체들에게 한국은 큰 매력이 없는 시장이었다. 한국 전체 시장 수요를 능가하는 월 생산 캐파(CAPA)를 보유한 중국 업체 입장에서, 시장 규모가 작고 요구사항은 까다로운 한국에 집중할 이유는 없었다. 대량 구매가 이루어지는 중국 현지 업체나 미국, 유럽 시장이 주 공략 포인트였다.

하지만 미·중 무역전쟁으로 분위기가 급변했다. 미국 및 서방 국가로의 수출길이 막히거나 제한을 받게 되자, 중국 업체들은 베트남, 인도, 말레이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무역전쟁 회피를 위해 생산기지를 이전하는 중국 임가공 업체들의 수요 덕분에 한동안 실적을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공장 이전 수요마저 서서히 완성 단계에 진입하며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셋째, ‘한국 시장’이 갖는 상징성이다. 중국산 설비의 한국행은 단순한 재고 처리를 넘어선 고도의 전략적 판단이다.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톱 티어 기업들이 포진해 있는 SMT 기술의 최전선인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국 업체들은 한국 시장 진출을 ‘하이엔드 시장 확장의 발판’으로 여기고 있다. ‘SMT 제조 공정 수준이 세계 최고인 한국 업체들이 우리 설비를 쓴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해외 시장에서 성능 및 품질을 보증하는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즉, 한국 시장에서의 성공은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기 위한 ‘등용문’인 셈이다.
중국산 설비가 파고드는 한국 시장의 지형도 또한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제 한국 시장에서 대규모 설비 수요는 찾아보기 어렵다. 스마트폰, 가전 등 대량 생산 기지는 베트남, 인도 등 해외로 거의 다 이전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SMT 라인은 주로 일부 고부가가치 하이엔드 모델 라인, 연구소의 시제품 생산 그리고 다양한 업종의 물량을 소화해야 하는 중소 임가공 업체들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시장 구조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키워드로 귀결된다. 임가공 업체들은 하루에도 수차례 생산 품목이 바뀌는 잡 체인지(Job Change)를 감당해야 한다. 이는 곧 장비의 ‘유연성’과 ‘대응 속도’가 생산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과거처럼 한 가지 제품을 수백만 개씩 찍어내던 시절의 전용 라인 개념은 사라졌다.
이 지점에서 중국산 설비의 가격 경쟁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물동량은 줄고 이익률은 박한 상황에서, 수억 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국산, 일산, 독일산 장비로 라인을 구성하는 것은 중소 업체들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모험이다. 성능은 준수하면서 가격은 절반인 중국산 설비가 이들의 니즈(Needs)를 정확히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중국산 설비의 한국 시장 안착이 ‘무혈입성’은 아니다. 현직의 업계 관계자들은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산 설비의 최종 성공 여부는 결국 ‘사후관리서비스(AS)’에 달려있다고 단언한다.
SMT 라인은 멈춤 없는 가동이 생명이다. 장비가 1시간만 멈춰도 납기를 맞추지 못해 막대한 손실이 발생한다. 과거 중국산 설비가 외면받았던 가장 큰 이유도 고장 시 부품 수급이 늦고, 기술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인지한 중국산 설비 공급 한국 대리점들은 생존을 건 태세 전환에 나섰다. 단순한 ‘수입 판매상’의 지위를 넘어, 자체적인 기술 서비스 능력을 갖춘 ‘토털솔루션 파트너’를 자처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고객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자체 엔지니어링 팀을 구성하고, 부품 재고를 국내에 대량으로 확보하고 있다.
특히 한국 시장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에 맞춰, 물종 변경에 따른 신속하고 정확한 기술 지원, 잡 체인지 대응이 가능한 숙련된 엔지니어를 전진 배치하고 있다. 한 대리점 대표는 “중국 본사의 기술 진화 속도에 맞춰, 국내 대리점들도 자체적인 서비스 능력과 다년간의 현장 지원 노하우를 결합해 ‘중국산은 AS가 안 좋다’는 편견을 깨고 있다”며 “자체 기술력으로 개조 및 튜닝까지 지원하며 한국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중국산 설비의 비약적인 발전과 한국 시장 침투는 국내 설비 업체들에게 심각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더 이상 ‘중국산은 싸구려’라는 안일한 인식으로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SMT 업계 관계자는 “중국산 설비의 가격 경쟁력은 전 세계 어느 업체도 이길 수 없는 구조적 우위에 있다”고 전제한 뒤, “그동안은 ‘성능 차이’를 방패 삼아 우위를 점해왔지만, 최근 중국 설비의 성능이 급등하면서 이 방패마저 뚫리고 있다”고 고객의 반응 변화를 이야기 했다.
실제로 특정 설비나 기능에서는 오히려 중국산이 국산보다 나은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특히 협업로봇 시스템 영역에서는 중국이 국산 기술을 압도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중국의 거대한 로봇 산업 규모가 기술력의 차이로 직결된 사례다. 중국은 방대한 데이터와 실증 사례를 바탕으로 로봇 제어 및 자동화 시스템에서 글로벌 톱 수준의 퍼포먼스를 안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어 “이처럼 성능까지 국산과 대등하거나 앞선 중국 설비에, 한국 대리점들의 안정적인 AS 지원 시스템까지 더해진다면 한국산 설비 업체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며 “국내 업체들은 지금이라도 큰 위기감을 가지고 고부가가치 기술 개발과 차별화된 서비스 모델 발굴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경기 위축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투자 비용 절감은 전 세계 제조업의 화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리적 가격’과 ‘검증된 성능’을 동시에 제시하는 중국산 설비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중국산 SMT 설비의 한국 시장 진출은 이제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시장은 중국 업체들에게 기술력을 증명하는 시험대이자,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나가는 베이스캠프가 되었다. 반면, 국내 설비 업체들에게는 안방을 사수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다.
바야흐로 SMT 설비 시장은 국경 없는 무한 경쟁 체제에 돌입했다. 중국산 설비가 한국의 제조 현장을 잠식해 들어오는 지금, 국내 업계가 어떠한 혁신과 대응으로 이 거대한 ‘차이나 스톰’을 막아낼지, 혹은 새로운 공존의 길을 모색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분명한 것은,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냉혹한 시장의 진리뿐이다. |